2010년 4월 13일 화요일

무력감과 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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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부모님과 대화한 기억이 난다.

- 그래, 어느 과에 가고 싶니?
- 네, 인류학과에 가고 싶어요.
- 인류학과?
- 네..
- 그런데 인류학과를 나오면 어떻게 먹고 살거니?
- ...

대답할 수 없었다. 인류학과를 가고 싶다고 했던 것도, 그냥 어떤 책을 읽고 재미있다고 생각해서, 그런데 그 책이 인류학자가 쓴 책이라고 해서 막연히 그 과에 가면 재미있겠다라고 생각했던 것 뿐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먹고 살거냐는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도 모르겠다. 어떻게 먹고 살건지... 다른이들에게 묻고 싶다. 어떻게 먹고 살 건지 아시겠어요? 공무원이 아닌 어른들께도 묻고 싶다. 어떻게 먹고 살건지 아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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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돌아가는 게 너무 복잡하고 뭐가 뭔지 모르겠다. 뭔 일이 있다해서, 걸 좀 알아보려고 하면, 도통 시작과 끝을 모르겠다. 그리고 느는 건 의심뿐인지, 누가 이렇다 주장하면 불쑥 의심부터 든다. 자기에게 이익이 되니까 저런 주장하는 것 아닐까? 믿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믿을 수 있는 사람도 있어야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닌가 한다. 그런데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살기에는 사는게 만만치 않은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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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지하철에서 구걸을 하는 아저씨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분에게 돈을 드리면 아저씨의 삶이 나아질까? 술을 사드시는 건 아닐까? 이 삶에서 돈이 만원 많으나 적으나 그게 과연 무슨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결국 생각만 하고 돈도 안 드렸다. 그 아저씨의 삶에서도 무력감이 느껴졌지만 나도 무력한 건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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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내 아이가, "엄마, 나는 블로깅하는게 정말 좋아요." 라고 하면, 거기에다 대고
"얘야, 블로깅은 취미로 하렴, 블로깅으로 어떻게 먹고 살수 있겠니?" 라고 말하는 무력한 엄마가 아니라, "얘야, 블로깅도 열심히 하면 정말 멋지고 의미있는 일이란다. 그리고 네가 노력해서 좋은 블로그를 만들면 성공할 수도 있어." 라고 말해줄 수 있는 엄마가 되고 싶다. 이렇게 말할 수 있으려면 블로그든 뭐든 잘하면 돈 벌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세상, 내가 세상을 어떻게 바꿀 힘은 없고... 그럼 마냥 그런 세상이 오기만을 기다려야 하나? 누군가 만들어주겠지 하고? 무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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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로 돈 벌 수 있는 세상이 올거다. 지식이 진가를 발휘하는 세상이 올거다. 세상이 어떻고, 제도가 어떻고, 나에게는 너무 큰 얘기로만 들린다. 결국 세상이 바뀌고, 제도가 이렇게 바뀌면 예예, 그렇기 돌아가는 거군요, 지당하굽쇼, 사바사바 두손을 비비면서, 나 같은 게 무슨 힘이 있다고 속으로 되뇌이며 살아가는 게 고작 내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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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다니면서 사람들에게서 무력감을 느꼈다. 현재에 죽어도 만족하지는 않지만, 당장 먹고 살 방도가 있다는 데에, 매달 잔고에 얼마가 찍힌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으며 한달한달 살아가는 삶이다. 그렇게 회사는 유지되는 것 같고, 회사 다니는 사람이 어떻게 되든 회사로서는 상관없다. 다른 사람을 뽑으면 되니까. 그런 대체가능성에 벌벌 떨며 지내는 게 회사원이다. 아쉬운건 회사원이다. 회사는 직원에게 같은 꿈을 공유하자고, 힘을 내서 일하라고 하지만, 회사다니는 사람들은 꿈을 꿀 여유조차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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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회사를 안 다니면 대체 뭘 해서 먹고 살건가?
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 앞에서 허물어졌을까?

정말 세상에는 먹고 사는 문제밖에 없는 걸까? 다른 문제들은, 그러니까 꿈이라든지, 이상이라든지, 그런거는 배부른 소리에 불과한걸까? 내 아이에게도 그렇게 가르쳐야 하는걸까? 꿈 따위는 꾸지 말고, 회사에 고분고분히 말 잘들어서 월급을 꼬박꼬박 받으면서 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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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의 불쌍한 아이들에게 기부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좋은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해외의 불쌍한 아이들밖에 없을까? 그리고 그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정말 투명하고 깨끗한가? 솔직히 못 믿겠다. 나보고 의심이 많다고 손가락질 하기 전에, 그런 프로그램들이 기부받은 돈을 쓰는 내역을 얼마나 투명하게 공개하는지, 그것을 얼마나 기부자들에게 알리려고 노력하는지를 점검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주 적은 돈을 기부하는 아이에게서 사진과 카드가 왔다. 그 아이는 고맙다고 했고, 자기에게 두 명의 여동생이 있는데 그 여동생도 배가 고프다고 했다. 나는 정말 썩을 대로 썩은 인간인가 보다. 거기에서 앵벌이 시키는 마케팅의 냄새를 맡다니. 그 아이에게 무슨 잘못이 있을까. 그 아이가 순수하게 쓰지 않고, 누군가가그 아이에게 그렇게 쓰라고 했다고 생각한 나에게 잘못이 있다. 어쨌든 그 일로 나는 기부금을 안 보내기로 했고 다시는 눈먼돈을 누구에게도 보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럴 돈이 있으면 차라리 내가 얼굴이라도 아는 아이에게 책 한권을 보내주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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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를 하는 거에 대한 생각은 이렇다. 사람이 살다보면 남을 때도 있고 모자랄 때도 있게 마련이다. 남을 때는 좀 나눠주고, 모자랄 때는 좀 도와달라고 하고, 그렇게 사는 게 좋은 것 같다. 물론 그럴 자신은 없다. 통장에 돈 남는다고 생활이 어려운 친구에게 돈을 줄 용기도 없고, 내가 돈 문제가 있다고 친구에게 돈 좀 달라고 할 용기도 없다. 현실과 이상은 이렇게나 멀다. 사실 주는 것보다 어려운게 돈 달라고 말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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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 민노씨네 블로그를 알게 됐다. 나는 블로그 초보이고, 민노씨는 영어 초보이고, 해서 나는 도움도 받았고, 민노씨의 영어실력 업그레이드를 하기 위한 시도도 하고 있다. 그리고 좋은 블로그글을 읽는 블로그 낭송등 재미있는 시도도 해보았다. 물론 민노씨를 오랫동안 알고 지낸게 아니고, 블로그의 글도 아주 많이 읽지는 못했기 때문에 민노씨를 아주 잘 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건, 민노씨는 블로깅하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는 거다. 하지만 현실은 블로깅으로는 돈을 못 번다. 나는 가끔 생각해본다. 민노씨는 생활비를 어떻게 벌까? 용돈은 무슨 돈으로 쓸까? 아는 사람들도 만나고 하려면 기본적으로 돈이 필요할텐데... 어떻게 생활하시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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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었는데, 오늘은 그런 현실에 대해서 화가 나고, 무력하기 짝이 없는 나에 대해서 화가 치민다. 결국 나는 아이가 뭔가를 굉장히 좋아한다고 하면 "그걸로는 먹고 살기 어렵단다." 라는 말을 하는 엄마가 되는 것일까. 민노씨에게도 이렇게 말해야 할까?
"민노씨, 블로깅하시는 것도 좋지만, 돈을 버셔야 하지 않겠어요? 블로깅으로는 아직 돈 버는 게 어렵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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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가 공정하게 유통되는 시장을 만든다고? 대체 그런건 누가 만들 수 있는 건가? 엄청난 자본이 있어야 뭔가 시스템을 만들 수 있는 것 아닌가? 아니, 자본만 있으면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엄청난 자본을 가진 이가 가치가 공정하게 유통되는 시장을 만들려고 노력이나 할까? '공정'이라는 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기에 바쁠텐데. 다들 뭔가 거대하게, 자동적으로, 멋지게 돌아가는 시스템을 꿈꾸는 듯 하다. 하지만 그런 시스템이 실현되는 것을 꿈꾸기에는 나는 너무나 작고 무력하다. 내가 돈이 흐르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 내 주머니에서 돈을 빼서 다른 이의 주머니에 넣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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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밀어 오르는 무력감을 돈으로 막기로 했다. 민노씨에게 작은 기부를 하려고 한다. 아마도 5만원이 될 것 같다. 민노씨에게 좋은 데서 밥 한번 사드린다는 마음으로 드리려고 한다. 5만원으로 좋은 데서 밥 못 먹는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5만원으로 돼지왕갈비를 5인분 먹을 수 있는 식당을 안다. 둘이서 먹으면 5인분보다 더 먹을 것 같지만, 우선 대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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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노씨가 블로그를 계속 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좀 힘을 보태줬으면 좋겠다. 특히 민노씨의 블로그를 좋아하는 사람들, 그리고 당장은 아주 모자라지는 않은 상황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나처럼 무력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민노씨에게 화이팅하고 좀 외쳤으면 좋겠다.

언젠가 민노씨가 전업블로거로 생활할 수 있는 때가 되면, 그 때는 나도 내 아이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거다.
"좋아하는 것을 하고 살아. 그걸로 당장 먹고 사는 게 어려울 수는 있어도, 같이같이 노력하다 보면, 다 살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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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노씨는, "의도는 고맙지만, 괜찮습니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하지 말고 용감하게 계좌번호를 댓글로 남겨줬으면 좋겠다. 치밀어오르는 무력감을 적은 돈으로라도 억누르는 것을 구체적으로 도와주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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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노씨의 계좌번호를 알아냈다! 기쁘다!
814-21-0374-963 (국민은행)
민노씨, 이해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무력감이 조금이나마 사라졌어요.

댓글 8개:

  1. 마음 따뜻한 나솔님. 배달된 글을 읽으면서 목소리만큼이나 마음이 따뜻한 분이라는 걸 다시 느꼈습니다. 편만하게 일상을 지배하는, 힘 없는 이들의 무력감에 대한 애뜻한 마음도 더불어 느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아니었지만, 민노씨도 예전부터 '소액 결제 수단'을 통한 블로거 돕기 혹은 비슷한 프로젝트에 대한 글을 많이 썼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실은 그런 생각에 힘 입어서 저는 대 놓고 구걸하기도 했는데, 제 처지를 변명 삼아 정작 제 자신이 참여하는 일에는 인색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나솔님 글을 읽고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나솔님은, 조금만 다짐해도 실현 가능한 작고 아름다운 실천을 잘 제안하시는군요. 따라가기가 어렵지 않아서 좋아요. 이런 아름답고 작은 실천을 되새겨 줘서 고마워요.



    그나저나, 이 글을 언제고 읽을 민노씨! 나솔님의 말마따나 부끄러워하지 말고, 소액 기부를 받을 수 있는 계좌 번호를 공개하세욧! 게으른 독자이지만, 좋은 블로깅을 계속하시라고 민노씨에게 압력을 넣을 수 있는 기회를 허하시압! 나도 몇 푼 보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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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비아메디아 - 2010/04/14 06:25
    안녕하세요 신부님, 두서없고 정돈안된 글에서 좋은 부분만 골라서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한명 한명은 힘이 없지만, 작은 마음이라도 모이면 굉장히 따뜻한 힘을 낼 수 있다고 믿어요.



    실은 이 글을 쓰고 나서, 무서웠어요. 무기력함을 극복하려다가 그 무기력함을 극복하려는 작은 시도조차 좌절되서 더 큰 무기력에 시달릴까봐요. 그런데 신부님의 답글이 큰 격려가 되었어요. 같은 마음을 가진 분이 계시다는 게 큰 힘이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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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기부에 동참합니다.

    가슴속에서 솟구치는 /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5만원. 참 어떻게 보면 작지도 크지도 않은 돈이지요.

    퇴근길에 동료와 간단히

    갈비 3인분 : 36,000

    참이슬 3병: 10,500

    담배 1갑: 3,000

    대리운전비: 10,000

    합계: 58,500



    남는건 다음날의 숙취뿐. 그리고 사라져 버린 나의 오후 5시간...



    허무합니다.



    민노씨와 같은 분께 기부하면,

    나솔님처럼 내 자식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니가 하고 싶고, 진정 원하는 일을 하다보면 다 살아가는 길이 생긴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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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oessol - 2010/04/14 21:28
    Thank you!

    공감 & 실천해주니 고맙수..



    모든 이가 하고 싶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잘 살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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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아.. 민노씨 계좌번호를 알아내셨군요. 한국 나가서 제 빈통장에 먼저 잔고를 채워야 겠네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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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아거 - 2010/04/17 12:09
    아거님, 읽어주시고 공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감사드려야 하는데, 도리어 아거님께서 고맙다고 하시니 어찌할 바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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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비밀 댓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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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Anonymous - 2010/04/23 17:34
    안녕하세요~ 우선 불어 공부 화이팅 하시고요!



    무력하다는 생각에 빠져들어서 저 나락으로 떨어지다가도, 무조건 무력한 게 아니라 지금 무력한 상태에 있을 뿐, 이 상태를 벗어나는 걸 찾는 건 제 몫이다라는 생각에 다시 희망을 다시 가지게 됩니다.



    제가 아프리카, 기부 관련해서 제대로 알고 쓴 게 아니고, 그냥 제 감정을 못 이겨서 쓴 글이라, 혹 많이 노력하시는 분들에게 실수를 한 건 아닌가 걱정됩니다. 경솔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한 양해를 구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이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조금씩 하다보면, 나아지지 않을까요? ^^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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