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31일 일요일

Do you speak English? - Nein.

벌써 일년

스위스에 온 지도 1년이 넘었다. 그 동안은 놀면서 독일어를 했다. 목표로 삼았던 정도는 배웠다고 생각했다. 곧잘한다고 칭찬도 가끔 들었다. 물론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때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대학 때 배운 러시아어도 못 써먹고, 영어도 못 써먹는 이 나라에 와서 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배우고 있는 걸까. 뭐, 괜찮다. 어쨌든 내가 한 선택이니까.


카페에 가는게 좋다.

나는 카페에 가는 게 좋다. 1년 동안 일도 안했고 학원도 다니다가 그만두고 나서는 마땅히 갈 데가 없었다. 그리고 집에만 하루종일 있으면 좀 답답했다. 그럴 때면 카페에 갔다. 분위기 전환도 되고, 어딘가로 출근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게다가 누군가 시키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더 좋았다. 오후 3시 쯤 되면 바람 좀 쐬어 볼까하면서 한가한 트램 - 출퇴근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 을 타고 여유롭게 카페에 갔다. 가서 한 두세 시간 죽치다가 나와서 카페 바로 옆에 있는 슈퍼에서 장보고 집에 오면 딱 저녁할 시간이었다.


스타벅스의 좋은 점

스타벅스에서는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다. 스위스의 보통 카페에서는 웨이트리스들이 수시로 다가와서 잔이 비어 있으면 뭘 더 시키겠냐고 묻는다. '더 시키든지 아니면 나가라는' 의미를 은연중에 비친다. 물론 웃으면서 말하지만 결국은 나가게 된다. 반면 스타벅스는 셀프 서비스이기 때문에 한 번 커피를 시키고 자리를 꿰차고 나면 점원이 더 시키겠냐고 묻는 법이 없다. 즉 자리를 비켜 달라는 압박감을 안 준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나뿐만이 아닌 걸까. 스타벅스에는 은근히 자리에 전세를 낸 듯한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노트북, 레포트, 공책 등을 펼쳐 놓고 '작업'중인 사람들이 많다. 다른 카페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다.


커피를 주문하시면 깊펠리를 할인해드려요!

깊펠리는 스위스어로 '크로와상'이라는 뜻이다. 커피와 크로와상의 조합은 스위스의 사랑받는 모닝세트라고 할 수 있다. 나도 가끔 일요일에, 약간 특별하게 아침식사를 하고 싶을 때면, 아침 일찍 동네 베이커리에서 크로와상을 두 개 사와서 에스프레소와 함께 먹기도 한다. 그 베이커리는 비싸서 자주는 못산다. 깊펠리 한 개가 거의 1600원하니까. 2500원짜리 길쭉한 빵을 사면 두 명이서 여러 번 먹는데, 3200원 주고 깊펠리를 사면 아침 식사로 땡이다. 스타벅스에서는 깊펠리가 보통 1800원 한다. 그런데 평일 오전 11시 까지는 커피를 주문하면 깊펠리를 1000원으로 할인해준다는 내용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카페에서 파는 깊펠리가 1000원이면 저렴한 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일 오전에 스타벅스에 가다.

하루는 여느 때와 달리 약간 일찍 카페에 갔다. 오래 앉아 있어도 눈치가 안 보이는 스타벅스에 갔다. 평소에는 아메리카노나 카페라테를 즐겨 마시는데 그 날 따라 왠지 커피가 안 땡겼다. 카페모카도 별로고, 좀 비싸기도 하고, 이것 저것 종류과 가격을 따지다 보니 제일 만만하면서도 마시고 싶은 것은 차(茶)였다. 차도 종류가 있어서 얼그레이, 쟈스민 등등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하는데, 그 중에서 얼그레이를 고르기로 했다. 우선 차 메뉴는 Tazo Tea였고, 종류는 얼그레이로 하고, 사이즈는 제일 작은 것, tall로 주문해야지...  아참, 아침이라 깊펠리가 할인되지! 그런데 커피 말고 차를 시켜도 깊펠리 할인이 되는 걸까? 일을 안해서 직접 돈을 안 벌기 때문인지 원래 구두쇠의 피가 흐르는 것인지, 나는 가격이 신경이 많이 쓰인다. 1800원이면 차마 아까워서 먹을 수가 없다. 안 먹고 말지. 할인이 되면 시키겠는데, 그림만으로는 할인이 되는지 확실치가 않았다. 내 머릿 속은 깊펠리가 1800원인지 1000원인지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타조 차이, 얼그레이 톨사이즈로 주시고 깊펠리 주시는데요, 깊펠리 할인 되나요?"

준비해 둔 주문내용을 한꺼번에 쏴 말하고, 제일 중요한 할인 부분을 마지막에 또박또박 물었다. 앞에 내용은 명확하니까 마지막 질문에 대한 대답을 예상하면서. 할인이 된다, 또는 안된다가 나올 텐데, 안된다고 하면 '그럼 깊펠리는 빼주세요'라고 말하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예상 외의 얘기가 나왔다.

"차이요 티요?"

나는 순간 당황했다. 참고로 러시아어로 '차이(чай)'는 영어의 '티(tea)'이다. 나는 그 질문이 이렇게 들렸다.


"차(茶)요, 아니면 차(茶)요?"

엥? 왜 이런 질문을 하지? 차를 달라고 했는데 차를 줘요? 아니면 차를 줘요? 그래서 나는,
"차이(чай) 주세요." 라고 했고 점원은, 그것을 '차이 라테'인가로 이해해서,
"차이 라테 한잔이요? 그런데 얼그레이는 티(tea)고 차이는 차이 라테인데요. 손님, 원하시는 게 라테 한 잔하고 티 한잔, 총 두 잔인가요?"

엥? 주문한 내용에 라테가 왜 나오지? 그리고 두 잔 시키는 거 아닌데.. 그냥 '차이' 한 잔 달라니까요~ 얼 그레이로. 내 머릿속은 패닉 상태였다. 예상하던 대답, 즉 깊펠리가 할인 되는지 안되는지에 대한 답을 못 들으니까. 왜 대화가 이렇게 꼬여 가는지 알지 못했다. 직원은 급기야 이렇게 말했다.

"Do you speak English?"


'제길, 내 독일어가 그렇게 구린가...'

그 간의 자존심이 허물어지는 순간이었다. 한편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래서 스위스에서 외국인이 독일어 배우기가 어려운 거야. 툭하면 영어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드니... 외국인보고 독일어 안 배운다고 뭐라고 하면서 독일어로 상대 안해주는 건 뭔데?' 물론 이런 생각은 말하지는 못하고, 영어로 대답했다.

"Yes, I would like a cup of tea, Earl Grey and one Gipfeli."

그제서야 왜 우리의 대화가 꼬였는지 알았다. 티(tea)를 차이(чай)라고 내가 잘못 말해놓고선 tea로 말했다고 착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직원이 좀 고지식했다는 느낌도 들었다. 얼그레이라고 얘기했으면 알아 들을 수 있는 거 아닌가? 그 직원은 내가 헷갈리게 주문하는 고객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두 메뉴를 섞어서 주문하는.

결국 깊펠리는 할인이 된다고 했다. 주문 내용이 명확해지니까 점원이 그제서야 깊펠리는 음료의 종류에 관계 없이 할인이 된다고 대답해주었다. 나는 깊펠리 할인되는지가 제일 중요했는데, 점원은 주문한 음료가 뭔지가 제일 중요했나보다. 사실 당연한 건데...  

결국에는 단어를 잘못 얘기한 내 실수였지만 '영어로 해달라는 순간'에는 그간의 노력이 참 허무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다음 번에는 이렇게 말해야지.


"Nein, Ich kann kein Englisch. (아뇨, 영어 못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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