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31일 수요일

블로그낭송 #3. 빨간 사과의 진실과 구라



빨간 사과의 진실과 구라라는 글을 소리내어 읽었습니다. 이 글에 나오는 솔까말에 들어있는 '솔직'을 보고, 최근에 의미를 알게 되었던 담론에 대한 생각이 났습니다.

제가 이해한 담론

담론은 권력을 만들어 내고 그 권력은 또다시 담론을 키우면서 서로를 계속 키웁니다. 큰 힘을 가지게 된 담론은 헤게모니를 가진 담론이라고 부르고 헤게모니를 가졌다는 이유로 그 담론은 더더욱 큰 힘을 가집니다. 하지만 헤게모니를 가졌다고 해서 그 담론이 정당하고 옳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지식을 가진 쪽과 가지지 않은 쪽이 나뉘면서 지식을 가진 쪽이 하는 말은 담론이 되고 힘을 갖게 되는데, 지식을 가지고 있는 쪽이 힘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서, 그 쪽에 있는 사람이 하는 말이 다 맞는 건 아니니까요. (담론05. 푸코의 담론이론, JSA, 지식노동의 목표)

'솔직'이라고 하면, 진솔하다, 정직하다라는 말이 떠오르면서 좋은 단어라고 생각하게 되는데요, 이는 '솔직'이라는 단어가 그 말 자체로 좋은 가치를 가지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이는 이 단어가 '힘'을 가진다고도 이해하게 됩니다.

솔직하게 말하다.

'솔직하게'를 붙이지 않으면 거짓으로 말하는 건가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즉 '솔직하게'라는 표현은 '아, 음, 어, 그게 말이지..' 이런 것처럼 말을 이어나가기 위해 붙이는 습관적으로 붙이는 표현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아..' 같은 단어와는 다르게 '솔직'이라는 말이 힘을 가지기 때문에 뒤에 하는 말에 어떤 '가치'를 덧붙여주는 작용을 하는 것 같습니다. 앤디님이 쓰신 이 글에서는 '솔직'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힘이 잘못 쓰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 같고요.

생각나는 몇 가지 표현들

- 솔직히 말해서...
- 다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 다 좋으라고 하는 말인데..
- 나 혼자 좋자고 하는 얘기 아니야..

이런 말들은 있으나 없으나 별로 상관없는, 더의상 의미를 갖지 않는 말인 것 같습니다. 이 뒤에 나오는 말은 그냥 말하는 사람의 의견일 뿐이에요. 하지만 '좋다', '너를 생각해준다' 등등 좋다는 가치판단이 들어간 단어들이 묘하게 부당한 힘을 가지게 되는 것 같아요.

중요한 건, 이런 표현들이 나왔을 때, 의미가 없다고 인식하고 가볍게 무시해서 넘어가주는 센스가 필요하지 않나 합니다.

설득의 심리학 - 인지해서 악용당하지 않도록

설득의 심리학이라는 책에서 읽은 내용이 생각납니다. 현대인은 무언가를 받으면 빚진 마음이 든다고 합니다. 그래서 뭔가를 받으면 주려는 마음을 갖게 된다고 해요. 문제는 이런 속성을 이용하는 단체가 있다는 거에요. 예를 들어 인도의 공항에 도착한 관광객에게 한 소녀가 다가와서 꽃을 선물합니다. 모금통을 들고 있지만 아무런 요구는 하지 않고요. 그런데 그 관광객은 빚을 졌다는 마음이 들기 때문에 그 소녀에게 모금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소녀가 안 보이면 꽃을 쓰레기통에 버리지요. 관광객이 사라지면 그 소녀는 그 꽃을 주워서 다른 관광객에게 줍니다...

소녀의 행위가 이렇게 반복된다는 것을 관광객이 알았다면, 즉 현대인의 속성을 이용한다는 것을 인지했다면 관광객이 과연 모금을 했을까요? 책에서 얘기하는 건, 우리에게 이런 습관들이 있고, 이렇게 악용될 수도 있으니, 적어도 그런 것에 대해서 인지를 하고 있자, 그래서 악용당하지는 말자.. 이런 내용이었다고 기억합니다.

솔까말이라는 말에 대해서도, 그 말이 붙여졌다고 해서 뒤에 나오는 말이 반드시 솔직하다는 것을 보장하지는 않는 다는 것을 적어도 인지해서, 세상을 긍정하는 나를 솔직하지 않은 나로 오해하는 그런 실수를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해 봅니다.



발아점

빨간 사과의 진실과 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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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29일 월요일

블로그낭송 #2. 증인의 증언을 믿을 것인가


기억력을 연구하는 이는 기억력이 좋은 게 좋을까, 안 좋은게 좋을까? 라는 글을 요전에 블로그에 썼습니다. 그 글의 댓글에서 관련된 재미있는 글을 알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시도했던 블로그 낭송의 기억이 좋아서 이 글로 이어 봅니다.

낭송한 글 : 증인의 증언을 믿을 것인가 (Gatorlog)

최근에 외국어로 읽는 과정에 대해서 읽고 있는데요, 단어의 모양을 보고 머릿속의 사전에서 일치하는 단어를 찾아내고, 발음과 연결시키고, 의미를 알아내고, 절/구 등 문장의 구조를 파악해 내고 등등.. 예전에는 읽는 과정이 어떤 세부적인 과정의 연속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었는데요, 의식하지 못했다고 해서 어떤 일이 어떤 순서도 원리도 없이 벌어졌다는 것은 아니겠지요.

아거님의 글을 읽다보니 뇌가 기억을 하는 것도 이와 같이 어떤 순서와 원리에 의한 복잡한 과정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과정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 기억한 결과가 원래 벌어졌던 사실과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뇌가 이야기를 재구성해 내는데에 토대를 제공하는 스키마의 존재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면, 무엇이 우리의 스키마를 만드는지, 영향을 주는지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갑니다. 이 글에서 소개한 바틀렛 경의 책을 도서관 목록에서 찾아보니, Remembering이라는 책은 없고, political propaganda라는 제목이 눈에 띕니다. 책을 읽은 건 아니지만 왜 그가 프로파간다에 대해서 썼는지 조금 알 것도 같아요.

갑자기 급우울해지네요. 세상에 대한 믿음이 없는건지, 속고만 산건지, 결국에는 강한 이들은 자신의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상대의 스키마에 가할 수 있는 영향력을 차곡차곡 쌓으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막연한 절망감이 듭니다. 희망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약한 이들은 자신의 스키마에 대해서 의문을 품을 수 있을까요? 의문을 품게 만드는 힘은 어디서 나올까요?

* 낭송파일이 있는 곳

2010년 3월 25일 목요일

#3. 나솔의 영어토크



나솔의 영어토크, 세 번째 방송입니다. (3/25, 12:00 - 12:50)


얘기나눈 내용

- 몇 가지 개념 소개
- 제 노트 필기법 소개
- 애플, 구글에 대한 간단한 생각


소개해드린 개념

- generalization
- input / intake
- implicit learning / explicit learning
- word recognition
- Automatization
- syntactic parsing

방송 중에...

- 비둘기가 일반화하는 것은 어떻게 실험했을까 궁금합니다.
- Explicit한 학습방법은 초반에 너무 많이 하면 거부감이 드는 것 같아요.
- 외국어 공부할 때 초반에는 implicit을 위주로, 점차 explicit을 늘리는 게 좋지 않나 합니다.
- 개발자 영어에서 과제를 드리는 것은 syntactic parsing 과정을 조금 더 편하게 해드리는 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syntactic parsing을 연습할 수 있게도 하고요.
- 한 줄에 키워드, 또는 구문 정도만 쓰는 노트 필기법 소개해드렸습니다. 복습할때 빨라요.
- 다음 번에는 시작 시간을 밤 11시에 할 예정입니다.

방송 들어주신 분

Albertyun님
- generalization : 수학에서의 정리와 비슷한 개념이네요..
- implicit learning : 자기도 모르게 습득되는거네용~
- explicit learning : 거부감이 들기도 해요...
- implicit, explicit : 암묵적, 명시적
- 애플은 폐쇄적이죠..

2010년 3월 24일 수요일

지방선거에 관한 생각

발아점이 된 글에 공감이 많이 갑니다. 특히 저처럼 정치에 대해서 잘 몰랐고, 이제서야 뭐가 어떻게 돌아가나 알고 싶은 상황에서는요. 정치에 대해서 궁금해서 여기저기에서 글을 읽다보면 이미 판단이 내려져 있어서 답답합니다. 집에서 MB는 좋은 분, 트위터에서 MB는 죽일 놈입니다. 저는 누구 말을 믿어야 할까요 제가 MB를 어떻게 볼 지는 제가 판단할 할 문제이고, 다른 분들도 각자 판단할 문제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판단을 이미 내려놓고 저에게 '강요'하는 경우를 보면 MB를 좋은 쪽으로 말하든 나쁜 쪽으로 말하든 근거를 충분히 대지 않으면 일단 신뢰가 안 갑니다. 어떤 경우에는 근거를 대줘야 MB가 나쁜 줄을 알겠냐는 경우도 있습니다. 무조건 MB를 괜찮은 인물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본인이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어쩔 수 없지만, 저에게도 똑같은 의견을 강요한다면 좀 곤란하지요.

정치에 대해서 글을 읽다보니 돈에 대한 얘기들이 생각납니다. "일단 벌고 보자", "아니다, 그래도 떳떳하게 살자." 쉽게 결론나지 않는 얘기지만, 입장을 어떻게든 정할 수 밖에 없는 문제고, 그 입장을 정하려면 자신만의 명확한 기준이 필요한 것 같아요. 내가 살아가면서 한 사람으로서 포기해서는 안되는 가장 중요한 가치.. 같은 것이요. (제가 바라는 사회는 제 아이가 어떤 취향이나 재능을 가졌든, 그것으로 먹고 살 수 있고 기본권을 존중받는 사회입니다. 그런 사회가 경쟁력 있는 사회가 아닌가 해요.)

정치에서도 그런게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내가 바라는 사회에서 꼭 지켜야 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그런 가치를 지향하고 있는 정치인은 누구일까. 거꾸로 접근해서, 각 정치인이, 또는 우리 지역에서 후보로 나오는 정치인은 어떤 가치를 추구할까. 어떤 사회를 이상적인 사회라고 생각할까. 이런 것들을 알고서 지지할 후보를 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말로 어떤 가치를 추구한다고 말하기는 쉽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저를 포함해서, 사람은 자신에게 유리한 말, 자신이 멋져 보이는 말을 하게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사람이 뱉은 말의 진위를 어떻게 가려내는지는 사람들마다 자기만의 노하우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 것을 가려내는 나름대로의 확인수법들이 있을 거에요. 애매하다면 확인하기 위한 무언가를 해야 하고요. 이런 질문을 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 등등. 자신만의 노하우를 활용해서 정치인을 제대로 파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정치인이 되었든, 정당이 되었든, 나름의 지향하는 바가 있을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뭉쳐 있는 정치인들은 무언가를 중심으로 해서 뭉쳐 있다고 생각해요. 이익집단 같은 성격을 띠는 집단도 있을 테고,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 집단도 있을 거에요. 정치인이 이익집단의 성격을 띠는 것은 이상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지만, 현재의 상태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는 것이 이상에 가깝다면, 학벌과 부모님 재산을 염두에 두는 것은 이상과는 거리가 멀더라도 현재의 상태일 수 있는 것처럼이요.

정치인이 누구이든 간에, 정치인 집단이 어떤 집단이든 간에, 그들이 뭉쳐있는 그 중심에 있는 가치를 누군가 투명하게 알려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보는 이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런 글들이 많으면 좋겠습니다. 민노씨가 쓰신 것처럼 블로거가 그런 것들을 해주면 정말 고맙겠지요. 저도 정치에 대해서는 아는 것은 없어도, 도와드릴 수 있는 부분이 있으면 최대한 참여하겠습니다. 질문하는 것은 할 수 있어요. 모르는 게 많으니까요.

기사에서 민심이라는 표현을 많이 봅니다. 국민의 마음. 과연 모든 개개인은 자신의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정치인에 대해서 잘 이해한 후에 자신의 마음을 확실하게 정한 상태일까요? 저는 선거에서 누가 뽑히는 것보다는, 개개인이 정치인과 정치집단을 잘 파악해서 선택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고 그런 과정을 거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발아점

(민노씨.네) 지방선거 블루스 : 차선과 차악이라는 망령

2010년 3월 18일 목요일

#1. 미국 민중사

<p.363-1 ~ p.364-1>

<p.364-2 ~ p.365-4>

<파일이 있는 곳>

하워드 진의 타계 소식을 트위터에서 접한 후, 인물과 사상에서 하워드 진에 대한 글을 읽고, 그 분이 쓰신 미국 민중사라는 역사책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몇 일 전에 도착했어요 ^^  혼자 읽는 것보다 같이 읽으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지금 읽는 부분을 녹음해서 올립니다.

지금 읽는 부분은 14장, War is the health of the state 라는 부분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참전할 당시의 얘기가 나오고요.제1차 세계대전에 대해서 "African roots of the war"라는 글을 발표한 Du Bois의 주장이 인상적입니다.

"It is no longer simply the merchant prince, or the aristocratic monopoly, or even the employing class, that is exploiting the world: it is the nation, a new democratic nation composed of united capital and labor."

"The African Roots of War" - W.E.B. DuBois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어요.>

#2. 나솔의 영어토크



나솔의 영어토크 두 번째 방송을 3월 17일에 밤 12시부터 약 50분 정도 진행했습니다. 개발자 영어 프로젝트에 참여하시는 분들 등이 라이브로 들어주셨고요. 생방송으로 진행하니까 참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들어주신 모든 분들께, 그리고 트윗 올려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방송에서 나온 애기들..

나솔이 읽고 있는 책(영어 공부 겸사겸사) - 미국 민중사, 소설의 진화
문법을 같이 짚어보기 -> 어떤 문법책을 가지고 계신가요?
꼬니님을 위한 특별한 과제 안내
우리는 Hyper local community! (
강정수님의 동영상 강의를 보고)
나솔이 개별 피드백을 고집하는 이유
Elliott Smith, Either/Or 앨범, Alameda

기억력을 연구하는 이는 기억력이 좋은 게 좋을까, 안 좋은게 좋을까?


기억은 여지없이 나를 실망시켰다. 결국 마지막에 죽은 사람은 시인이 아니었으니까....내가 인간 메모리를 연구하는 사람 맞는지 모르겠다. 정말 슬퍼진다.

1. 기억력을 연구하는 이는 기억력이 좋은 게 좋을까, 안 좋은 게 좋을까?

본문을 듣거니 읽거니 하다보니까 눈에 더 띄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위에 인용한 부분이고요.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어요. 기억력을 연구하는 이는 기억력이 좋은 게 좋을까, 안 좋은 게 좋을까? 무슨 기준으로 좋은지 나쁜지를 판단하는 것은 순전히 이 포스트를 쓰는 저에게 달려 있다는 생각에 다시 한 번 기쁨을 느끼면서... 암기과목 시험을 보는 이의 경우에는 기억력이 좋은 게 더 좋을 거라고 생각해요. 당연한 얘기지만요. 그럼 기억력을 연구하는 이는 어느 편이 더 좋을까요? 흠. 생각을 좀 해보고요. 기억력을 연구하는 이는 기억력이 좋은 사람들의 기억력만 연구하는 게 아닐테니까, 별로 상관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연구자체를 하기 위해 대학에 가거나 연구과정에 들어가는 과정에서의 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기억력이 좋은 게 좋겠지만요.

잠깐 제 얘기를 하자면, 자랑처럼 들리지만(ㅠ.ㅠ), 주위에서 간혹 '너는 외국어에 재능이 있으니까 재능없는 내 마음을 몰라'라고 해요. 그런데 제가 하고 싶은 건 외국어를 가르치는 거에요. 가르치는 방법을 연구하는 거에요. 특히 재능없는 이에게요. 큐피트의 화살표가 이리 어긋날 수도 있는 걸까요? 외국어를 가르치기 위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배우는 사람에 대해서 잘 아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저는 외국어에 재능이 있으니까 재능없는 사람의 마음을 잘 알 수 없다는 '심각한 결함'을 가지고 있는 걸까요? 조금 다르게 '나는 한국 사람이고 한국에서 자랐으니까, 외국인 보다는 한국사람을 더 잘 안다고 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어.'라는 결론을 어찌어찌 내렸어요.

기억력을 연구하는 분이 연구 대상인 사람을 더 알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좋은 기억력이 아닌 다른 무언가일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2. 글쓴이의 뇌는 왜 시인이 죽었다고 기억했을까요?

글쓴이가 기억하는 영화의 결론은  실제 영화의 결론과 다릅니다. 그렇다면 글쓴이는 왜 시인이 죽었다고 기억했을까요? 기억내용 자체가 사라졌다면 또는 너무 깊이 숨어버렸다면 누군가 죽었다는 것도 생각이 나지 않아야 할텐데요. 그런데 하필 시인이 죽었다는 내용을 뇌가 기억해 낸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해 봤어요.

뇌가 처음에 영화를 봤을 때 아마 이야기의 전개를 따라 갔겠지요. 그런데 실제 영화는 경우A로 진행되었지만, 글쓴이의 뇌는 경우A는 좀 뭔가 안맞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요? 마음에 안 들거나, 더 나은 전개방향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뇌는 경우A'가 더 맞다고 또는 마음에 든다고 생각하고, A'를 기억공간에 저장시킨게 아니었을까요? A를 A로 기억하는 게 정확하게 기억한다는 면에서는 우월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반면에 A를 A'로 보는 것은 컴퓨터가 하지 못하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A와 A'사이의 갭은 꼭 좋다고 나쁘다고 할 수 없는 그 무언가인것 같아요. 그러니, 슬퍼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

* 발아점

블로그 낭송 : 아거의 '기억의 연약함(Memory's fragile power)' (민노씨)

Memory's fragile power (아거)


* 관련 트윗 중에서

@minoci
기억력을 연구하는 이는 기억력이 좋은 게 좋을까, 안 좋은게 좋을까? (@nassol99) http://bit.ly/duPgge // 흥미로운 질문, 따뜻한 추론...

@heterosis
이건 마치 철학자는 철학적인가하는 질문과 같은.. RT @minoci: 기억력을 연구하는 이는 기억력이 좋은 게 좋을까, 안 좋은게 좋을까? (@nassol99)http://bit.ly/duPgge // 흥미로운 질문, 따뜻한 추론...

@nassol
철학자는 자기가 철학하는 것 자체가 본업(?)이기 때문에 철학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인간 기억력 연구자의 본업은 자기 기억력으로 뭔가를 하는게 아닌, 기억력에 대해서 연구하는 거기 때문에, 본인기억력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2010년 3월 14일 일요일

사과

친구도 어려울 때 위로가 되어주는 친구가 있듯이, 노래도 아픈 마음, 고민하는 마음을 달래주고 감싸주는 노래가 있다. 나에게는 셀린 디온의 노래가 그랬다. 그 때, 모두에게서 도망치고 싶었을 때, 혼자 있고 싶었을 때 내가 달려 갔던 곳은 아파트 꼭대기의 낡은 소파였다. 거기에 푹 파묻혀 이어폰으로 노래를 들으면서, 따라부르면서 마음을 달랬다.

고교시절 버스를 타고 가다보면 가끔 유명한 가수의 노래를 부르는 무명가수의 노래가 흘러 나올때가 있었다. 그걸 들으면서 나도 나중에 그런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는 일은 화려해 보이지는 않더라도 좋을 것 같았다. 물론 그것을 꿈이라고 말하고 그 길을 갈 용기는 없었다. 그저 노래를 연습해서 친구에게 들려 주었을때, 친구가 좋아하는 것을 보면서 기뻐했을 뿐이었다.

그 때에는 한창 친구들과 노래방에 많이 놀러 다니던 때였다. 가끔 학원에 간다고 해놓고 야자대신 노래방에 가서 실컷 노래를 부르면서 친구들과 스트레스를 풀곤 했다. 015B, 이소라, 박정현, K2, 피노키오.. 이들의 노래는 마르고 닳도록 불렀던 것 같다. 그리고 좋아하는 팝송이 목록에 있으면 꼭 챙겨서 불렀다. 태진에는 있는 노래가 금영에는 없는 경우가 많아서 나는 태진이 더 좋았다.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를 기회도 몇 번 있었다. 대학 때 동네 노래 자랑 예선에 나간다고 트럭 위에서 '소유하지 않는 사랑'을 불렀다. 예선도 통과하고 경품으로 소형 청소기도 받았다. 다만 본선에 나갔을 때 운동장에서 이 노래를 다시 불렀더니 굉장히 썰렁했던 기억이 난다. 나이 드신 분들이 많아서 아마 노래를 모르셨던 것도 한 이유였던 것 같다.

또 한 번은 종로에서 밀레니엄프라자 지하에서 어떤 노랫소리에 이끌려서 갔다가 나도 즉석에서 신청해서 노래를 불렀다. 대회는 아니었고, 그냥 부르고 싶은 사람은 신청해서 부르는 거였다. 오히려 청중에 아는 사람이 없으니 반응에 신경쓰지 않고 부를 수 있어서 좋았다.

노래방에서의 반응 중에 신경쓰이는 반응이 있었다. 나보고, 못 부른다고 얘기하는 반응이 아니었다. 노래방은 가수가 공연하는 곳이 아니다. 그냥 마음데로 좋아하는 노래를 한껏 멋드러지게 불러볼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고 나면 - 물론 칭찬해주려는 의미라는 건 알지만 - 네가 부른 다음에는 부담되서 못 부르겠다고 한다. 또는 너랑 같이 노래방 못 가겠다고 한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 맥이 빠진다. 누가 더 잘 부르는지 경쟁하기 위해서 노래방에 가는 건 아니지 않나. 그럼 자기보다 노래를 못 부르는 사람을 보면 자신감이 생겨서 노래 부르기가 더 편하나? 나는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는 게 좋았다. 가수가 부른 노래는 전문적일지는 몰라도 노래방에 가면, 친구나 동료가 어떤 노래를 좋아하는지 알게 되고, 나도 그 노래를 좋아하면 마이크가 없어도 같이 따라 부르는 게 좋았다. 그런데 노래 실력을 비교하는 이런 소리를 들으면 흥이 깨지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은 소수였고 나는 여전히 사람들과 노래방 가는 걸 좋아했다.

지인들의 결혼식에서 몇 번인가 축가를 부르기도 했다. 그 때만 해도 누가 축가 불러 달라고 하면 거절하는 적이 없었다. 내가 직접 모르는 사람인데, 친구가 자기 아는 사람이라며 축가를 해달라고 했을 때도 나는 기꺼이 응했다. 나는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것으로 다른 이의 결혼을 축하한다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길을 가다가 전혀 모르는 사람이 결혼을 하는 걸 보면, 축하하는 마음이 들게 마련이다. 하물며 누군가 내가 노래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축가를 해달라고 하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축가를 하기 전날에는 스트레스와 부담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내일 목이 쉬면 어쩌지? 지난번처럼 반주가 늦게 오면 어쩌지? 반주가 키를 바꾸지 못한다고 하면 어쩌지? 괜히 한다고 덥썩 말했다고 후회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예정된 결혼식이 취소되는 경우는 없었고 축가를 부를 차례가 되면 마음을 비울 수 밖에 없었다. 이 한 가지만 생각하면서.
 '결혼을 축하하는 마음이 중요한거야.'

회사에 들어갔을 때, 신입사원을 환영하는 회식 자리에서 노래를 시켰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불렀다. 문제는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이 분위기를 띄우기는 커녕 다운시킨다는 것. 하지만 나는 별 생각이 없었다. 그 이후에도 뭔가 누군가 쇼를 해야 하는 자리가 생길 때면 - 나는 분위기를 못 띄우지만 - '너 노래 한 번 해봐라'했다. 나는 막연히 불쾌감을 느꼈다. 물론 그런 얘기를 하는 분들 중에는 노래자체를 좋아해서 노래를 해달라는 분들도 있었다. 하지만 다른 뉘앙스를 풍기는 분도 있었다. '너 노래 좀 한다며? 어디 실력 좀 보자.' 이런 느낌을 받은 후로 나는 회사에서 노래하는 것에 대해 뭔가 복잡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회식 자리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분위기 띄우는 타이밍이 오자 역시나 불려 나갔고, 나는 찜찜하긴 했지만 그냥 분위기 못 띄우는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노래를 끝내고 누군가 이런 얘기를 했다.
 '야, 너 또 꼬부랑 노래냐? 좀 신나는 것 좀 해봐.'

그 말이 내 가슴 깊이 박혔다. 내가 노래하면 분위기가 다운된다는 것을 막연히나마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들으니까, 굉장히 상처를 받았다. 그런 얘기를 지금 듣는다면 이렇게 맞받아 칠 수 있을까? '전 분위기 띄울 줄 모르니까, 당신이 춤을 추든 노래를 하든 직접 분위기를 띄워 보시지 그러세요' 모르겠다. 적으도 속으로는 그렇게 말할 것 같다. 하지만 그 때의 나는 너무나 중심이 없어서 이렇게 생각했다. '분위기를 띄울 수 있는 노래를 하나 준비해둬야겠다. 아무래도 트로트가 분위기 띄우기에는 좋겠지?' 나는 주현미의 짝사랑을 연습했다. 다음번에 누가 노래하라고 하면 이 노랠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어김없이 회식자리는 돌아왔고, 나는 불려 나갔다. 짝사랑을 불렀다. 효과가 있었다. 사람들이 박자에 맞춰서 손뼉을 쳤고, 분위기가 좀 업되는 것 같았다. 노래를 마치고 나니 뭔가 해냈다는 뿌듯하다는 마음까지도 들었다.하지만 그 후로 나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기가 꺼려졌다. 심지어는 가까운 사람이 축가를 부탁했는데도 거절했다.

거절한 이유는 나도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고 보니, 그리고 이 글을 쓰다보니 이제는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래서 내 안의 나에게,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뒤늦게 용서를 구한다.

미안...

2010년 3월 12일 금요일

아쉬타카님의 생일을 축하드리며

the Real Folk Blues의 게으른 독자이지만, 글을 읽을 때마다 항상 느껴지는 영화, 배우, 감독 등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글에 마음이 훈훈해지고 합니다. Tzara라는 블로그에서 알게된 윌리엄 진서의 글쓰기 생각쓰기라는 책에서 이런 구절이 나왔는데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아쉬타카님의 블로그가 떠올랐어요.
"글을 잘 쓰려면 글 쓰려는 대상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한다."
트위터에서 오늘 생일 선물 받으셨다는 트윗을 보고 문득, 저도 선물을 드리고 싶었어요. 특히 선물 사진에 나온 '노트'를 보고 제가 만든 아이디어 노트를 드리고 싶었어요. 그런데 주소를 모르기 때문에 선물 포스트를 올리기로 했어요. 제 아이디어 노트 만드는 법을 알려 드릴게요. 물론 아쉬타카님은 글을 많이 쓰실 테니까 노트 쓰시는 방법이 있으시겠지만, 혹시 제 아이디어 노트에서 뭔가 '이건 좋은데?'라는 부분을 발견하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는 수첩에 뭘 쓰는 걸 좋아하는데요, 문제는 나중에 찾아보려면 찾는데 한참 걸린다는 거에요. 물론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썼던 노트를 슬슬 넘기면서 읽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급하게 뭔가 써둔 것을 찾을 때는 낭패스러워요. 그래서 이런 방법을 쓴답니다.

우선 새로운 노트의 각 페이지에 페이지 번호를 적어요. 그리고 앞에서 몇 장은 비워두고 그 다음페이지부터 쓰기 시작해요. 뭔가 쓰고 싶은게 있으면 잽싸게 수첩을 꺼내서 '새'페이지에 내용을 적어요. 어느 정도 쓰다보면 쓰려는 내용을 잘 나타내주는 '제목'을 쓰고요. 제목은 형광펜으로 표시해둬요. 제목이 잘 보여서 나중에 쓱 훑어볼때 편하더라고요.


끄적이다 보면 이럴 때도 있어요. 뭐에 대해서 글을 쓰다가 전혀 다른게 생각이 나요. 그려면 페이지를 넘겨서 새로운 페이지에 새로 쓰고 싶은 것을 적어요. 그리고 원래 쓰다만 내용은 다시 쓰고 싶어질 때 이어서 쓰고, 쓸 공간이 부족하면 - 다음 페이지가 이미 채워져 있기 때문에 - 그 다음 새로운 페이지에 적어요. 이러면 하나의 글이 여러 페이지에 나뉘는 뒤죽박죽인 상태가 되는데요. 이에 대한 대응책이 또 있어요. 새로운 글을 쓰면 앞에 비워 두었던 페이지에 '페이지 번호'와 '제목'을 써요. 목차 페이지가 되는 거지요. 그리고 글 하나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으면, 글 제목을 똑같이 쓰고, 그 우측에 번호를 1,2,3,4 이렇게 붙여요.


어떤 때에는 블로깅하려는 글을 대략 노트에 써두기도 하는데요, 블로그에 올리고 나서는 빨간펜으로 물결 표시를 해둬요.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올렸는지 긴가민가 하거든요. 간단히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싶은 것도 적어놓고, 찾았으면 그 옆에 찾았음! 또는 빨간펜으로 체크 표시를 하기도 하고요. 물론 컴퓨터로 바로 찾아볼 수도 있지만, 이 컴퓨터 때문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 같아서, 자잘하게 찾아보고 싶은 것은 모아서 한꺼번에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이렇게 수첩을 쓰다보니, 2010년에 들어서 쓴 수첩이 벌써 일곱개가 되었어요. 이제까지 쓴 수첩들의 목차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 시행착오 중이랍니다 -.- - 우선은 수첩에 권번호를 붙여두기로 했어요.


뭔가 대단한 걸 기대하셨는데 별거 없군이라고 생각하시지 않고 성의만이라도 기쁘게 받아주실 거라고 생각하면서...

Happy Birthday

nassol 드림

2010년 3월 10일 수요일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대해 읽은 것과 생각한 것

오빠가 읽고 있는 교육철학에 대한 책을 읽고 있다. 말로만 듣던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대해서 설명한 글이었는데, 읽다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책(읏, 책 이름이 뭐더라. 무슨 Philosophy of education 누구누구 그런거였는데)에 나오는 동굴의 우화를 그림으로 표시해보고, 이해한 내용, 궁금한 내용 등을 적어보았다.



3번 - 쇠사슬에 묶인 죄수

지하동굴에 갇혀 살고 있는 죄수, 자세히 보면 발목이 쇠사슬(chain)에 묶여 있다.


13번 - 쇠사슬

죄수를 묶은 쇠사슬은 무지와 무관심(ingorance, apathy) 등을 의미한다.


14번 - 쇠사슬을 풀어낸 죄수

지하동굴에 갇혀 살고 있는 죄수 중에는 쇠사슬을 풀어내는 경우가 있다. 죄수가 쇠사슬의 존재를 어떻게 인지하는지 궁금하다. 분명히 뭔가가 죄수에게 '쇠사슬'은 걸리적거리는 것이다라고 신호를 주는 힘이 있다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이데아의 세계에서 전해지는 빛의 온기일까?


14번은 쇠사슬을 풀고 어떤 힘인가에 이끌려 위로 올라간다. 여기서 궁금한 점, 왜 죄수는 하필이면 "위"로 올라가려고 할까? 철학이라는 단어는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데, 이 죄수의 안에는 지혜에 대한 사랑, 이데아세계의 최고의 선(The Good, 9번)에 대한 어떤 사랑의 마음, 사모하는 마음이 있나보다. 이 마음을 누가 심어줄까? 이데아 세계의 햇빛일까? 이 온기는 4번 죄수에게도 미치고 14번 죄수에게도 똑같이 미칠텐데 왜 4번 죄수은 그 마음이 커지지 않고, 14번 죄수은 그 마음이 커진 것일까? 의문 투성이다. 4번 죄수와 14번 죄수의 차이는 무엇일까? 플라톤은 자신의 이상사회의 사람들은 세 그룹(three classes) 으로 분류했다. 일하는자, 군인, 다스리는자. 교육을 시켜서 추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계속 공부를 시키고 철학 공부를 시켜서 다스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스리는자는 어떤 사명감으로 나라를 The Good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했다. 4번 죄수와 14번 죄수의 차이는 아마도 추상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인지도 모르겠다.


12번 - 정신, Mind, Soul, Self, Conscious ...

죄수의 위에 정신을 표시했다. 정신으로 죄수는 변증법을 행한다.


11번 - 위로 열심히 올라가는 죄수

여튼, 14번 죄수는 어떤 마음에 이끌려, 어떤 무언가에 이끌려 올라간다. - 이것을 뒤에 나온 Augustine, 어거스틴은 faith, intuition(신념, 직관)으로 표현한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어거스틴은 알기 위해서는 그 전에 믿어야 한다고 했다. 물론 그는 종교적인 신념을 얘기하긴 했다. 신을 알기 위해서는 그 전에 신을 믿어야 한다고. 신기한 건, 이제까지 종교적인 신념이나 믿음을 직관이랑 비슷한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는 것.. 올라가는 동안 계속 아래로 잡아당기는 힘에 대한 생각은 아래 2번에서 추가했다. 플라톤은 이렇게 가파른 동굴벽을 올라가는데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변증법'이라고 했다. 즉 이성으로 변증법적인 대화를 하면서 이데아 세계를 향해 올라갈 수 있다고 했다. 변증법은 dialectic. 그렇다면 변증법이란 거는 동굴의 벽을 찍어서 그것을 잡고 올라갈 수 있는 어떤 도구 정도?


8번 - 동굴을 벗어나 이데아 세계에 진입한 죄수

동굴(현실세계)과 이데아세계의 경계에 대한 생각은 아래 2번에 대한 얘기에서 추가했다. 죄수는 이 온기의 원천인 태양을 직접 느끼고 두 눈으로 보게 된다. 그리고 그에 대해서 성찰한다. 아마도 무한한 기쁨, 자유로움, 충만함 등을 느낄 듯.. 이것으로 해피엔드~ 로 끝이날 것 같은데, 플라톤은 여기서 끝내지 않는다.


7번 - 동굴의 친구들을 떠올리는 죄수

이데아 세계에서 한없이 기쁨을 느낀 죄수는 동굴에 있을 적의 친구들을 떠올린다. 내가 본 것을 알려줘야겠다. 실제로 우리는 쇠사슬에 묶여서 실체도 못보고 그림자만을 보면서 살아가는 무지하고 불쌍한 존재이다라는 것을 알려줘야겠다. 쇠사슬을 풀고 같이 이데아 세계로 가세~ 라고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동굴로 돌아간다. 석가모니가 열반의 경지에 들었지만, 그대로 열반에 머물지 않고 속세로 돌아와서 가르치는 행위를 했던 것도 그런 비슷한게 아닐까?


음. 그런데 여기서 내가 생각한 것에 모순이 생긴다. 2번에서 아래로 작용하는 힘, 욕망의 힘을 생각했는데, 그럼 위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가는 죄수는 다시 욕망에 지배받게 되는가? 아닐 것 같다. 적어도 중력, 욕망에 지배받는 영역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틀림없을텐데, 돌아가는 죄수는 다시 욕망에 지배를 받는 존재는 아닐 것 같다. 플라톤은 이런 얘길 한다.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이데아를 알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이데아가 인간 안에 있다는 것은 아니라고.. 인간은 인간이데아의 일부를 가지고는 있지만, 인간은 인간이데아 자체는 아니라는 것.. 그럼, 8번 단계에서, 이데아 세계에 온전히 도착했을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일까? 인간이 인간이데아로 변하는 변화같은..  


6번 - 이데아 세계에서 동굴로 돌아온 죄수

여튼 이데아 세계를 갔다온 죄수와 아닌 죄수를 구분하기 위해서 이데아 세계에 갔다온 죄수는 동굴 벽의 바깥에 표시했다. 그리고, 모순되는 부분은 있지만 어쨌든, 이데아 세계에 갔다온 죄수는 중력의 지배를, 즉 욕망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고 정했다. 문득 든 생각. 이데아는 그 무엇에 대해서도 종속되지 않는다고 한다. 늙지도 않고 낡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 즉 이데아는 중력의 법칙에도 종속되지 않는다는 의미? 그렇다면 인간이 아닌 인간이데아로 변한 죄수가 중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의미? 반드시 모순되는 것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4번 - 죄수가 휘두르는 칼

동굴로 돌아온 죄수는 신이 나서 다른 죄수들에게 이데아 세계로 가자고 얘기한다. 그런데 다른 죄수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동굴 안에 계속 살던 죄수들은 그림자 지식, 즉 이데아를 온전히 보지 못하고, 그림자만을 보고 그것에 대해서 얘기하고, 그것에 대한 지식으로 서로 얘기한다. 한편 이데가 세계를 갖다 온 죄수는 갖다 오는 동안 그림자 지식을 잊어버리거나, 멀리하거나 등등 해서 소위 동굴에 남아있던 죄수들과 얘기가 안 통하나 보다. 여튼, 그래도 이데아를 본 죄수는 다른 죄수들의 상태가 너무 안타깝기 때문에 계속 설득을 하지만 오히려 죄수들은 칼을 휘두른다. 핍박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듯..  여기서 궁금한 건, 왜 죄수들은 핍박을 할까? 이데아를 본 죄수들이 본 것을 못 믿겠다면, 못 믿겠다라고 하면 그만일 것을 왜, 핍박까지 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다. 도둑이 제발 저린 것일까란 생각도 들고. 이데아 세계를 본 이들은 단지 나와 생각이 다른 거야라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핍박하는 것을 보면, 뭔가 '불안'이 느껴진다. 핍박하는 이들은 뭐가 불안한걸까?


5번 - 보호막

죄수가 칼을 휘두르지만, 그래서 현실 세계에서 돌아온 죄수는 심지어는 죽임을 당하기는 하지만, 그 칼은 돌아온 죄수에 닿을 수 없다. 왜냐하면 돌아온 죄수는 이데아이고 칼은 이데아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을 당했지만, (아마도 이미 이데아인 존재인) 예수님은 죽임을 당할 수 없다. 이데아이기 때문에. 보호막은 이데아와 이데아 아닌 것의 사이에 존재하는 막이라기 보다는, 그 존재가 같은 시공간에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 같다는 생각을 표현해 본 것이다.

9번 - 태양, The Good

이데아 세계의 최고의 선을 의미..


이미 내 생각이 많이 들어갔지만 또 추가하기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에 대해서 처음 접했을 때에는 '동굴'이라고 하니까 지상과 평행한 모양을 생각했는데, 다시 동굴의 우화를 읽다보니까, 쇠사슬에서 벗어난 죄수가 기어올라간다는 대목이 있다. 걸어서 동굴 밖을 나가는 게 아니라, 올라가고 있다는 것은 동굴의 모양이 지상과 평행하지 않고 수직, 즉 지하로 깊이 파혀 있는 동굴을 의미한다. 지하로 깊이 파여있다는 것은 중력이 작용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 중력이 있기 때문에, 쇠사슬에서 벗어난 죄수가 위로 올라가는 것은 더 힘들어 진다. 그래서 그림에 추가했다.


1번

세계에서는 중력의 원척이고, 이것이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욕망'의 원천이다.


2번

중력이 작용하는 방향이다. 중력의 영향이 미치는 범위 내에 있는 한, 죄수가 위로 올라가는 일은 힘겨울 것 같다. 끊임없이 욕망에 시달릴 것이다.


하지만 중력, 욕망의 원천에서 멀어질 수록, 작용하는 중력의 힘은 줄어들 것이며, 완전히 그 중력의 힘이 미치지 않는 지점, 그곳이 바로 이데아 세계로 진입하는, 동굴의 끝이 아닐까? 생각이 이에 미치면 이런 생각이 든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지옥이구나. 구원을 받지 않으면 지옥불이 이글이글거리는 불구덩이에 떨어지는게 아니라, 지금의 상황에서 계속 살게 될 거라는 것. 지금처럼 계속 무지와 욕망에 지배당하면서 살게 될 거라는 것. 그게 바로 지옥이라는 것. 블로그에 예전에 썼던 글과, 노트에 쓰다만 이야기가 생각난다.


흠, 원래는 읽은 내용과 생각한 내용을 좀 구분해서 쓰려고 했는데 쓰다보니 다 뒤죽박죽 되어버렸다.

2010년 3월 9일 화요일

#1. 나솔의 영어토크


제1차 라디오방송
방송시간 : 2010년 3월 9일 한국시간으로 오후 7시반부터 (대략 2-30분 정도 예상해요~)

앞부분 방송입니다~>>
1
개발자 영어 2차 보고 드립니다. (2010.1.30 - 3.9)
3월에 새로 참여하고 계신 Ggony님과 Hanbit님을 반겨주시고요~
Jenny, 민노씨, Albertyun, Pooh님은 다른 홈페이지에서 진행하다가 이제 개발자 영어 홈페이지를 같이 쓰게 되었어요. 과제를 열심히 해주신 분들의 자취를 보시려면, 이 파일을 참조해주세요~ >> 엑셀파일

2
기존까지는 주1회를 목표로 했는데요, 헬스클럽에서 트레이터가 3-4일에 한번 운동하라는 얘기를 했는데요, 왠지 영어도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아서, 3-4일에 한 번, 즉 주2회 정도 공부할 수 있도록 제출 예정일을 바꿀게요~

3
저도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주신분들께 감사드려요 ^^
학습자의 피드백
웹상으로도 주셨고, 대화를 통해서도 알려주셨어요.
특히, 소리내어 녹음하신 분들은, 소리내어 읽는 것이 매우 효과가 좋다는 것에 모두 동의해 주셨어요.

4
작은 계획들을 소개합니다..

Pooh : 교육철학을 해석하고 내용에 대한 질문&답변으로 얘기를 진행해 보고 있고요,
민노씨 : 함께 영어를 공부하는 내용, 그리고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 대화를 나눈 내용을 소재로 삼아서 영어공부와의 접점을 찾아보는 과정 등등을 책을 함께 써보기로 했습니다~
Ggony : 해석을 거의 매일 하실 수 있기 때문에, 기사를 해석해서 블로그에 올려서 공유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어요~
wonkwh : stackoverflow라는 사이트를 활용해서 영어공부하는 방법에 대한 의견을 나눠보았어요.

뒷부분 방송입니다 >> 클릭


5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 도움을 청하고 싶은 것...
IT관련해서 읽고 싶으신 기사가 있으시면 알려주시면 큰 도움이 되겠어요.
저는 뭐가 개발자 분들에게 재미있는 내용인지를 잘 모르겠어요 ^.^

6
새로운 코너를 안내합니다.
학습자의 의문들이라는 코너를 만들었어요.
영어공부 관련해서 궁금한 점들 부담없이 남겨주시면, 제가 능력껏 답변을 드릴게요.
제가 학문적인 기초가 없다보니 근거있고 체계있는 답변은 못드리겠지만,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정도의 의견 교환의 장이 되었으면 합니다 ^^


블로그낭송 #1. 대화의 무대에서 넓혀가는 경계와 사이의 지평

Via media라는 블로그가 있어요. 최근에 대화의 무대에서 넓혀가는 경계와 사이의 지평이라는 글이 올라왔어요. 이 글을 읽기 전에 민노씨와 대화하다가 '블로그 페르소나'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블로그의 변화의 방향에 대한 얘기를 듣고 공감하다가, 민노씨.네 블로그에 그 글(블로거 페르소나 혹은 블로그가 도달한 슬픔 : 아거와 관객모독)이 올라와서 반가울세라 읽고 있던 차에, 이런 트윗이 올라왔어요. 저같은 트위터 눈팅족은 멘션이 한번 올라오면 감격의 눈물방울을 떨구지요.

minoci @viamedia 아이폰으로 블로그 읽으며 느낀 것인데요. @nassol99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말로 들려주는 블로그 http://nassol.textcube.com/136 를 가끔 시도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특히 신부님 글은 더욱.

물론 민노씨는 주낙현신부님이 직접 블로그의 글을 읽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었겠지만, 저는 제 마음대로 제가 읽어보았어요. ^.^ 그게 블로그의 묘미인 듯 합니다. 생각나면 바로 해볼 수 있는.. 사실 어제 외국어 공부에 대한 방송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이런저런 스트림 서비스를 찾아보다가 유스트림을 써보고, 한글 설명이 안되는 건 좀 불편하지만 그래도 다른 부분은 마음에 들어서 이것으로 해야지~ 라고 생각했었거든요. 준비없이 방송을 하자라는 생각이었는데, 막상 준비없이 하니까 이것저것 막히는 게 많았어요. 그래서 뭔가 준비도 해야 하고 연습도 해야겠다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림을 배우는 분들은 그려진 그림을 보고 따라 그려보듯이, 그것과 똑같은 건 아니지만, 주낙현신부님이 쓰신 글을 소리내어 읽어 보면 방송을 위한 준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막상 읽다보니까, 눈으로 쓱 읽어내릴 때보다는 훨씬 글의 내용이 더 명확하게 이해되는 것 같아요. 특히 켄터배리 대주교의 어떤 '공간'에 대한 성찰 부분은 소리내어 읽어보지 않았다면 길어서 그냥 패스~ 했을 것 같은데, 소리 내어 읽어보니 어떤 감동이 있었어요. 그리고 글의 마지막 부분에 그 감동이 더 커졌어요. 이 공간이 어떤 공간인지 이렇게 깊이 고민하는 분들이 있다는 것, 이런 공간을 바라는 분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런 공간을 만들어가면서 살아가면 되겠다는 그런 희망들...

아래는 대화의 무대에서 넓혀가는 경계와 사이의 지평이라는 글을 소리내어 읽은 것입니다. 블로그 글을 눈으로 보시면서 들어보세요~




* 블로그 낭송관련 포스트들을 모았어요!



2010년 3월 1일 월요일

2010년 3월의 일기

이 포스트는 수시로 업데이트 될 수 있습니다. :)

 

@ 자유로워지는 순간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하는 순간 자유로움을 느낀다. 무언가에서 벗어난다. 이걸 알아야 하는데 모른다는 자책감, 모른다고 하면 상대방이 속으로 비웃을거라는 두려움, 모르는 걸 일단 아는척을 해놓고 상대방이 그것을 알아채면 어떨까 하는 불안감.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지 않으면 이런 마음에 시달리게 되는 것 같다.

 

@ 키에르케로그의 죽음에 이르는 병

소설의 진화를 읽다가 키에르케고르에 관한 얘기가 나왔다. 집에 우연히 책이 있길래 들춰보았는데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몇 장을 읽었는데, 읽고 싶은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는데도 잘 이해가 안된다. 이상하다.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는 건 분명히 내가 이 글에서 뭔가를 느꼈기 때문인데, 읽어도 이해가 안된다니.. 독일어로 읽으면 너무 어려울 것 같고, 영어로 읽으면 더 나으려나? 

 

실존주의, 실존적이라는 게 뭘까? existential 이라는 표현, '실존'이라는 표현 둘 다 와닿지 않지만, 이런 문장은 와닿는다. "What should we do with our lives?" 소설의 진화에서는 이런 부분도 나온다. "We are all in a state of becoming, and that therefore logical thought is a poor guide to living. We need a deeper, more passionate kind of instinct for truth and freedom." 뭔가 깊고 열정적인, 진리와 자유에 대한 본능.. 

 

@축적해야 하는 이유

돈을 벌고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모아서 큰 덩어리를 만들어야 뭔가 큰 일을 하는데 쓸 수 있다. 지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지식을 매 순간에 잘 습득하는 것도 중요하고 주는도 필요하겠지만 모아서 큰 덩어리를 만들어 두지 않으면 뭔가 큰 일을 하는데 쓸 수 없을 것 같다. 매순간이 중요하지만, 미시적인 그 순간에 지식이 흐른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긴 시간의 텀을 두고 그 지식이 축적되어야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지 않나 싶다. 축적되지 않고 그런 순간들이, 흐르는 순간 들이 있었다는 것 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축적하지 않는다면 그 흐르는 순간에 대한 기억이 없어지는 편이 낫다. 내가 만약 축적했더라면, 무언가를 할 수 있었을텐데라는 회한이 남는다면 괴로울 것 같다.

 

@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질문이 너무 광범위해서 한번 질문을 바꿔 보앗다. 

'누구와 누구의 사이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누구와 그것을 할 것인가?'

 

@ 블로그 발견!

지평이라는 분이 쓰시는 블로그 http://edu.minds.kr/

정말 재미있다!!

 

@ 2009년, 한해동안 떨쳐버릴 수 없었던 그 한 문장

펄벅 여사가 쓴 '여성의 행복론'인가였다. 책을 많이 읽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했다. 어떤 사람으로 살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질문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쉽사리 대답할 수도 없었다.

 

뭐라뭐라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에 대한 염증, 또는 내가 뭐라뭐라 말을 많이 할때 느끼는 염증, 그것은 무엇을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그런 염증이 느껴졌던 것이 아닐까.

 

@ 차라리...

여행에 가서 몇 시간을 걸어서 도착한 그곳.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 문득 알랭 드 보통의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에서 리처드슨인가라는 사람이 풍경에 대해 글을 잘 썼고, 그 글에 프루스트가 감동받았다는 내용이 생각났다. 이 생각은 곧 시니컬한 생각으로 이어져 내가 여행에 들인 돈을 글을 잘 쓰는 사람에게 주어서 여행을 하게 하는게 훨씬 낫겠다란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아도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싶을 정도로 감동을 받지 못한다면 아름다운 풍경을 보는게 무슨 소용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름다운 풍경을 하필이면 왜 내가 굳이 봐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 민족이란

국제 분쟁의 이해라는 책에서 읽은 민족(Nation)의 개념에 대한 부분. 식민상태에서 벗어난 후  결국은 식민지배국이 그어놓은 경계를 따르게 된다. 결국 지배가 목적이었으므로. 그리고 민족의 개념에 대해서는 경계에 있는 사람들이 제일 많이 고민한다고 한다. 민족의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은 사람들..

 

@ 내가 꿈꾸는 세상

이 어떤 세상인지 아직 뚜렷하게는 모르겠다. 하지만 점점 뚜렷하게 감지하고 있다. 어디까지나 꿈꾸는 것이니, 꿈이라도 뚜렷하게 꾸는 것은 내 자유일테지. 내가 꿈꾸는 세상을 느끼는 창은 - 질문, 연결, 만남, 대화, 축적, 관계, 농밀한 만남, 창작...

 

@ 세상을 탓하는 이에게

세상이 문제라고 탓하는 이여, 세상이 당신이 꿈꾸는 모습이었던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나요? 세상이 유토피아에서 시작한 게 아니라면, 지금 세상이 유토피아가 아닌 것은 당연한 게 아닐까요? 이 세상을 이루는 사람들 중 하나가 바로 당신. 이 세상의 아주 작은 부분을 당신이 꿈꾸는 모습으로 만들어가는 일을 지금 이순간 하고 있다면 나는 당신의 친구입니다.

 

@ 이야기

아이들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라고 

어른들은 이야기를 지으면서 살고..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