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31일 수요일
블로그낭송 #3. 빨간 사과의 진실과 구라
2010년 3월 29일 월요일
블로그낭송 #2. 증인의 증언을 믿을 것인가
2010년 3월 25일 목요일
#3. 나솔의 영어토크
- 제 노트 필기법 소개
- 애플, 구글에 대한 간단한 생각
- Automatization
2010년 3월 24일 수요일
지방선거에 관한 생각
2010년 3월 18일 목요일
#1. 미국 민중사
"It is no longer simply the merchant prince, or the aristocratic monopoly, or even the employing class, that is exploiting the world: it is the nation, a new democratic nation composed of united capital and labor."
#2. 나솔의 영어토크
문법을 같이 짚어보기 -> 어떤 문법책을 가지고 계신가요?
꼬니님을 위한 특별한 과제 안내
우리는 Hyper local community! (강정수님의 동영상 강의를 보고)
나솔이 개별 피드백을 고집하는 이유
기억력을 연구하는 이는 기억력이 좋은 게 좋을까, 안 좋은게 좋을까?
기억은 여지없이 나를 실망시켰다. 결국 마지막에 죽은 사람은 시인이 아니었으니까....내가 인간 메모리를 연구하는 사람 맞는지 모르겠다. 정말 슬퍼진다.
기억력을 연구하는 이는 기억력이 좋은 게 좋을까, 안 좋은게 좋을까? (@nassol99) http://bit.ly/duPgge // 흥미로운 질문, 따뜻한 추론...
@heterosis
@nassol
2010년 3월 14일 일요일
사과
2010년 3월 12일 금요일
아쉬타카님의 생일을 축하드리며
"글을 잘 쓰려면 글 쓰려는 대상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한다."
2010년 3월 10일 수요일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대해 읽은 것과 생각한 것
오빠가 읽고 있는 교육철학에 대한 책을 읽고 있다. 말로만 듣던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대해서 설명한 글이었는데, 읽다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책(읏, 책 이름이 뭐더라. 무슨 Philosophy of education 누구누구 그런거였는데)에 나오는 동굴의 우화를 그림으로 표시해보고, 이해한 내용, 궁금한 내용 등을 적어보았다.
3번 - 쇠사슬에 묶인 죄수
지하동굴에 갇혀 살고 있는 죄수, 자세히 보면 발목이 쇠사슬(chain)에 묶여 있다.
13번 - 쇠사슬
죄수를 묶은 쇠사슬은 무지와 무관심(ingorance, apathy) 등을 의미한다.
14번 - 쇠사슬을 풀어낸 죄수
지하동굴에 갇혀 살고 있는 죄수 중에는 쇠사슬을 풀어내는 경우가 있다. 죄수가 쇠사슬의 존재를 어떻게 인지하는지 궁금하다. 분명히 뭔가가 죄수에게 '쇠사슬'은 걸리적거리는 것이다라고 신호를 주는 힘이 있다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이데아의 세계에서 전해지는 빛의 온기일까?
14번은 쇠사슬을 풀고 어떤 힘인가에 이끌려 위로 올라간다. 여기서 궁금한 점, 왜 죄수는 하필이면 "위"로 올라가려고 할까? 철학이라는 단어는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데, 이 죄수의 안에는 지혜에 대한 사랑, 이데아세계의 최고의 선(The Good, 9번)에 대한 어떤 사랑의 마음, 사모하는 마음이 있나보다. 이 마음을 누가 심어줄까? 이데아 세계의 햇빛일까? 이 온기는 4번 죄수에게도 미치고 14번 죄수에게도 똑같이 미칠텐데 왜 4번 죄수은 그 마음이 커지지 않고, 14번 죄수은 그 마음이 커진 것일까? 의문 투성이다. 4번 죄수와 14번 죄수의 차이는 무엇일까? 플라톤은 자신의 이상사회의 사람들은 세 그룹(three classes) 으로 분류했다. 일하는자, 군인, 다스리는자. 교육을 시켜서 추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계속 공부를 시키고 철학 공부를 시켜서 다스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스리는자는 어떤 사명감으로 나라를 The Good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했다. 4번 죄수와 14번 죄수의 차이는 아마도 추상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인지도 모르겠다.
12번 - 정신, Mind, Soul, Self, Conscious ...
죄수의 위에 정신을 표시했다. 정신으로 죄수는 변증법을 행한다.
11번 - 위로 열심히 올라가는 죄수
여튼, 14번 죄수는 어떤 마음에 이끌려, 어떤 무언가에 이끌려 올라간다. - 이것을 뒤에 나온 Augustine, 어거스틴은 faith, intuition(신념, 직관)으로 표현한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어거스틴은 알기 위해서는 그 전에 믿어야 한다고 했다. 물론 그는 종교적인 신념을 얘기하긴 했다. 신을 알기 위해서는 그 전에 신을 믿어야 한다고. 신기한 건, 이제까지 종교적인 신념이나 믿음을 직관이랑 비슷한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는 것.. 올라가는 동안 계속 아래로 잡아당기는 힘에 대한 생각은 아래 2번에서 추가했다. 플라톤은 이렇게 가파른 동굴벽을 올라가는데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변증법'이라고 했다. 즉 이성으로 변증법적인 대화를 하면서 이데아 세계를 향해 올라갈 수 있다고 했다. 변증법은 dialectic. 그렇다면 변증법이란 거는 동굴의 벽을 찍어서 그것을 잡고 올라갈 수 있는 어떤 도구 정도?
8번 - 동굴을 벗어나 이데아 세계에 진입한 죄수
동굴(현실세계)과 이데아세계의 경계에 대한 생각은 아래 2번에 대한 얘기에서 추가했다. 죄수는 이 온기의 원천인 태양을 직접 느끼고 두 눈으로 보게 된다. 그리고 그에 대해서 성찰한다. 아마도 무한한 기쁨, 자유로움, 충만함 등을 느낄 듯.. 이것으로 해피엔드~ 로 끝이날 것 같은데, 플라톤은 여기서 끝내지 않는다.
7번 - 동굴의 친구들을 떠올리는 죄수
이데아 세계에서 한없이 기쁨을 느낀 죄수는 동굴에 있을 적의 친구들을 떠올린다. 내가 본 것을 알려줘야겠다. 실제로 우리는 쇠사슬에 묶여서 실체도 못보고 그림자만을 보면서 살아가는 무지하고 불쌍한 존재이다라는 것을 알려줘야겠다. 쇠사슬을 풀고 같이 이데아 세계로 가세~ 라고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동굴로 돌아간다. 석가모니가 열반의 경지에 들었지만, 그대로 열반에 머물지 않고 속세로 돌아와서 가르치는 행위를 했던 것도 그런 비슷한게 아닐까?
음. 그런데 여기서 내가 생각한 것에 모순이 생긴다. 2번에서 아래로 작용하는 힘, 욕망의 힘을 생각했는데, 그럼 위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가는 죄수는 다시 욕망에 지배받게 되는가? 아닐 것 같다. 적어도 중력, 욕망에 지배받는 영역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틀림없을텐데, 돌아가는 죄수는 다시 욕망에 지배를 받는 존재는 아닐 것 같다. 플라톤은 이런 얘길 한다.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이데아를 알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이데아가 인간 안에 있다는 것은 아니라고.. 인간은 인간이데아의 일부를 가지고는 있지만, 인간은 인간이데아 자체는 아니라는 것.. 그럼, 8번 단계에서, 이데아 세계에 온전히 도착했을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일까? 인간이 인간이데아로 변하는 변화같은..
6번 - 이데아 세계에서 동굴로 돌아온 죄수
여튼 이데아 세계를 갔다온 죄수와 아닌 죄수를 구분하기 위해서 이데아 세계에 갔다온 죄수는 동굴 벽의 바깥에 표시했다. 그리고, 모순되는 부분은 있지만 어쨌든, 이데아 세계에 갔다온 죄수는 중력의 지배를, 즉 욕망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고 정했다. 문득 든 생각. 이데아는 그 무엇에 대해서도 종속되지 않는다고 한다. 늙지도 않고 낡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 즉 이데아는 중력의 법칙에도 종속되지 않는다는 의미? 그렇다면 인간이 아닌 인간이데아로 변한 죄수가 중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의미? 반드시 모순되는 것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4번 - 죄수가 휘두르는 칼
동굴로 돌아온 죄수는 신이 나서 다른 죄수들에게 이데아 세계로 가자고 얘기한다. 그런데 다른 죄수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동굴 안에 계속 살던 죄수들은 그림자 지식, 즉 이데아를 온전히 보지 못하고, 그림자만을 보고 그것에 대해서 얘기하고, 그것에 대한 지식으로 서로 얘기한다. 한편 이데가 세계를 갖다 온 죄수는 갖다 오는 동안 그림자 지식을 잊어버리거나, 멀리하거나 등등 해서 소위 동굴에 남아있던 죄수들과 얘기가 안 통하나 보다. 여튼, 그래도 이데아를 본 죄수는 다른 죄수들의 상태가 너무 안타깝기 때문에 계속 설득을 하지만 오히려 죄수들은 칼을 휘두른다. 핍박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듯.. 여기서 궁금한 건, 왜 죄수들은 핍박을 할까? 이데아를 본 죄수들이 본 것을 못 믿겠다면, 못 믿겠다라고 하면 그만일 것을 왜, 핍박까지 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다. 도둑이 제발 저린 것일까란 생각도 들고. 이데아 세계를 본 이들은 단지 나와 생각이 다른 거야라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핍박하는 것을 보면, 뭔가 '불안'이 느껴진다. 핍박하는 이들은 뭐가 불안한걸까?
5번 - 보호막
죄수가 칼을 휘두르지만, 그래서 현실 세계에서 돌아온 죄수는 심지어는 죽임을 당하기는 하지만, 그 칼은 돌아온 죄수에 닿을 수 없다. 왜냐하면 돌아온 죄수는 이데아이고 칼은 이데아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을 당했지만, (아마도 이미 이데아인 존재인) 예수님은 죽임을 당할 수 없다. 이데아이기 때문에. 보호막은 이데아와 이데아 아닌 것의 사이에 존재하는 막이라기 보다는, 그 존재가 같은 시공간에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 같다는 생각을 표현해 본 것이다.
9번 - 태양, The Good
이데아 세계의 최고의 선을 의미..
이미 내 생각이 많이 들어갔지만 또 추가하기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에 대해서 처음 접했을 때에는 '동굴'이라고 하니까 지상과 평행한 모양을 생각했는데, 다시 동굴의 우화를 읽다보니까, 쇠사슬에서 벗어난 죄수가 기어올라간다는 대목이 있다. 걸어서 동굴 밖을 나가는 게 아니라, 올라가고 있다는 것은 동굴의 모양이 지상과 평행하지 않고 수직, 즉 지하로 깊이 파혀 있는 동굴을 의미한다. 지하로 깊이 파여있다는 것은 중력이 작용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 중력이 있기 때문에, 쇠사슬에서 벗어난 죄수가 위로 올라가는 것은 더 힘들어 진다. 그래서 그림에 추가했다.
1번
세계에서는 중력의 원척이고, 이것이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욕망'의 원천이다.
2번
중력이 작용하는 방향이다. 중력의 영향이 미치는 범위 내에 있는 한, 죄수가 위로 올라가는 일은 힘겨울 것 같다. 끊임없이 욕망에 시달릴 것이다.
하지만 중력, 욕망의 원천에서 멀어질 수록, 작용하는 중력의 힘은 줄어들 것이며, 완전히 그 중력의 힘이 미치지 않는 지점, 그곳이 바로 이데아 세계로 진입하는, 동굴의 끝이 아닐까? 생각이 이에 미치면 이런 생각이 든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지옥이구나. 구원을 받지 않으면 지옥불이 이글이글거리는 불구덩이에 떨어지는게 아니라, 지금의 상황에서 계속 살게 될 거라는 것. 지금처럼 계속 무지와 욕망에 지배당하면서 살게 될 거라는 것. 그게 바로 지옥이라는 것. 블로그에 예전에 썼던 글과, 노트에 쓰다만 이야기가 생각난다.
흠, 원래는 읽은 내용과 생각한 내용을 좀 구분해서 쓰려고 했는데 쓰다보니 다 뒤죽박죽 되어버렸다.
2010년 3월 9일 화요일
#1. 나솔의 영어토크
학습자의 피드백
블로그낭송 #1. 대화의 무대에서 넓혀가는 경계와 사이의 지평
2010년 3월 1일 월요일
2010년 3월의 일기
이 포스트는 수시로 업데이트 될 수 있습니다. :)
@ 자유로워지는 순간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하는 순간 자유로움을 느낀다. 무언가에서 벗어난다. 이걸 알아야 하는데 모른다는 자책감, 모른다고 하면 상대방이 속으로 비웃을거라는 두려움, 모르는 걸 일단 아는척을 해놓고 상대방이 그것을 알아채면 어떨까 하는 불안감.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지 않으면 이런 마음에 시달리게 되는 것 같다.
@ 키에르케로그의 죽음에 이르는 병
소설의 진화를 읽다가 키에르케고르에 관한 얘기가 나왔다. 집에 우연히 책이 있길래 들춰보았는데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몇 장을 읽었는데, 읽고 싶은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는데도 잘 이해가 안된다. 이상하다.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는 건 분명히 내가 이 글에서 뭔가를 느꼈기 때문인데, 읽어도 이해가 안된다니.. 독일어로 읽으면 너무 어려울 것 같고, 영어로 읽으면 더 나으려나?
실존주의, 실존적이라는 게 뭘까? existential 이라는 표현, '실존'이라는 표현 둘 다 와닿지 않지만, 이런 문장은 와닿는다. "What should we do with our lives?" 소설의 진화에서는 이런 부분도 나온다. "We are all in a state of becoming, and that therefore logical thought is a poor guide to living. We need a deeper, more passionate kind of instinct for truth and freedom." 뭔가 깊고 열정적인, 진리와 자유에 대한 본능..
@축적해야 하는 이유
돈을 벌고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모아서 큰 덩어리를 만들어야 뭔가 큰 일을 하는데 쓸 수 있다. 지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지식을 매 순간에 잘 습득하는 것도 중요하고 주는도 필요하겠지만 모아서 큰 덩어리를 만들어 두지 않으면 뭔가 큰 일을 하는데 쓸 수 없을 것 같다. 매순간이 중요하지만, 미시적인 그 순간에 지식이 흐른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긴 시간의 텀을 두고 그 지식이 축적되어야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지 않나 싶다. 축적되지 않고 그런 순간들이, 흐르는 순간 들이 있었다는 것 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축적하지 않는다면 그 흐르는 순간에 대한 기억이 없어지는 편이 낫다. 내가 만약 축적했더라면, 무언가를 할 수 있었을텐데라는 회한이 남는다면 괴로울 것 같다.
@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질문이 너무 광범위해서 한번 질문을 바꿔 보앗다.
'누구와 누구의 사이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누구와 그것을 할 것인가?'
@ 블로그 발견!
지평이라는 분이 쓰시는 블로그 http://edu.minds.kr/
정말 재미있다!!
@ 2009년, 한해동안 떨쳐버릴 수 없었던 그 한 문장
펄벅 여사가 쓴 '여성의 행복론'인가였다. 책을 많이 읽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했다. 어떤 사람으로 살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질문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쉽사리 대답할 수도 없었다.
뭐라뭐라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에 대한 염증, 또는 내가 뭐라뭐라 말을 많이 할때 느끼는 염증, 그것은 무엇을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그런 염증이 느껴졌던 것이 아닐까.
@ 차라리...
여행에 가서 몇 시간을 걸어서 도착한 그곳.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 문득 알랭 드 보통의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에서 리처드슨인가라는 사람이 풍경에 대해 글을 잘 썼고, 그 글에 프루스트가 감동받았다는 내용이 생각났다. 이 생각은 곧 시니컬한 생각으로 이어져 내가 여행에 들인 돈을 글을 잘 쓰는 사람에게 주어서 여행을 하게 하는게 훨씬 낫겠다란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아도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싶을 정도로 감동을 받지 못한다면 아름다운 풍경을 보는게 무슨 소용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름다운 풍경을 하필이면 왜 내가 굳이 봐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 민족이란
국제 분쟁의 이해라는 책에서 읽은 민족(Nation)의 개념에 대한 부분. 식민상태에서 벗어난 후 결국은 식민지배국이 그어놓은 경계를 따르게 된다. 결국 지배가 목적이었으므로. 그리고 민족의 개념에 대해서는 경계에 있는 사람들이 제일 많이 고민한다고 한다. 민족의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은 사람들..
@ 내가 꿈꾸는 세상
이 어떤 세상인지 아직 뚜렷하게는 모르겠다. 하지만 점점 뚜렷하게 감지하고 있다. 어디까지나 꿈꾸는 것이니, 꿈이라도 뚜렷하게 꾸는 것은 내 자유일테지. 내가 꿈꾸는 세상을 느끼는 창은 - 질문, 연결, 만남, 대화, 축적, 관계, 농밀한 만남, 창작...
@ 세상을 탓하는 이에게
세상이 문제라고 탓하는 이여, 세상이 당신이 꿈꾸는 모습이었던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나요? 세상이 유토피아에서 시작한 게 아니라면, 지금 세상이 유토피아가 아닌 것은 당연한 게 아닐까요? 이 세상을 이루는 사람들 중 하나가 바로 당신. 이 세상의 아주 작은 부분을 당신이 꿈꾸는 모습으로 만들어가는 일을 지금 이순간 하고 있다면 나는 당신의 친구입니다.
@ 이야기
아이들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라고
어른들은 이야기를 지으면서 살고..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