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 31일 월요일

지지합니다.

몇 일 집을 비우고 돌아왔더니, 심상정 후보의 사퇴라는 문구가 보입니다. 그리고 어떤 스님께서 4대강에 반대하신다는 유서를 남기시고 분신하셨고요.

중요한 일이 일어나는 시기에 저는 멀리서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유유자적하지만 깨어 있는 매 순간이 괴롭습니다. 내가 깨어있는 이 시간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밥 먹고 건강을 지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누리는 이 안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무언가를 배웠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의미있게 보내지 못하는 이 시간을 내가 가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배부른 소리겠지요. 이런 상황을 이미 누리고 있는 사람의 배부른 소리겠지요. 하지만 어떤 의미를 찾기를 바라는 게 저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루하루의 일정에 치여 사시는 분들도 가끔은 하루를 돌아보며, 또는 지난 날을 돌아보며 나는 어디로 가고 있나라는 질문을 던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 것이 없음에, 이룬 것이 없음에, 내가 없더라도 세상은 전혀 상관없다는 생각에 괴로워하는 분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지방선거때문입니다. 민노씨의 글을 읽고 무슨 글이라도 쓰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서 이 글을 씁니다.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내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나는 누구를 지지하지?" 이 질문을 던진 후로 시간이 몇 달 정도 지났는데 이렇다할 답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지난 번에 지방선거에 대한 생각을 글로 쓰면서 이렇게 생각했어요. 만들어져 있는 결론을 받아들이지 말고 스스로 판단하자.

내가 스스로 결정한다.

스스로 결정하고 싶지만 도저히 답이 안 나옵니다. 답안지에 표시를 해야 하는 종료시간은 다가오고 있는데 도저히 답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답을 제대로 내려면 시간이 하루 이틀이 아닌 꽤 많은 시간이 걸릴 거라는 겁니다. 스스로 판단하려면 이런저런 것들을 알아야 하는데, 이제까지 그것들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과거가 후회스러워서 답안지에 표시를 하지 않는 것으로 그 후회를 대신하자니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립니다.

1. 이런 이런 이유로 누구를 지지한다.
2. 누구를 지지할 지 모르니 아무도 지지하지 않는다.

2번으로 어물쩡 넘어가려고 했지만 2번을 선택하는 것조차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1번을 선택하든 2번을 선택하든, 그것은 누군가의 손을 들어주는 것인데, 문제는 2번을 선택했을 때에는 누구의 손을 들어주는지조차도 모른다는 거에요. 그래서 1번을 선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누구를 지지해야 할지에서 막힙니다.

트위터를 한 지 몇 개월 정도 됐습니다. 작년 9월인가부터 눈팅을 한 것 같은데요. 트위터를 하다보니 제가 따르는 트위터러, 블로거들이 몇 분 생겼습니다. 누가 어떤 트윗을 올리면, 그 트윗의 내용이 옳다, 그르다 여부는 다 판단을 하지는 못해요. 하지만 어떤 느낌은 듭니다. 트위터러가 어떤 분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이기적인 느낌이 드는 분도 있고, 방황하는 느낌이 드는 분도 있어요. 시니컬한 한마디 속에 깊은 고민을 담는 느낌이 드는 분도 있고요. 트윗을 쭉 보다보니 어떤 트위터러에게 어떤 '신뢰'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똑같은 140자 길이 제한 내에서 쓰는데도, 시간이 갈수록, 어떤 트위터러가 올리는 트윗에는 좀 더 신뢰가 가고, 어떤 트위터러가 올리는 트윗에서는 대충 넘기게 됩니다. 그러고보니 오프의 인간관계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생기는 것 같아요. 한 그룹의 사람을 계속 만나다보면, 개중에는 좀 더 신뢰가 가는 사람이 있고, 신뢰가 안 가는 사람이 있죠.

오프에서 신뢰가 가는 분에게서 정치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었다면, 아마도 그 분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런데 오프에서는 정치에 대한 얘기를 별로 못 들었어요. 제가 이제까지 살면서 제일 정치에 관한 얘기를 많이 접했던게 지난 몇 개월간의 트위터에서였습니다. 트위터에서 제가 마음으로 따르는 분들은 진보신당을 지지합니다. 그래서 어느 지점부터 저는 진보신당을 가깝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논리적인 이유는 없어요. 정책 얘기를 하는데, 저는 정책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을 안해봤고, 실제로 진보신당이 어떤 정책을 왜 내거는지 별로 알아보지도 않았어요. 다만, 진보신당을 지지하는 분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어떤 고민을 하시는 지는 트위터에서 많이 접했어요.

예를 들어, 민노씨는 블로거인데요, 민노씨는 블로그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합니다. 이 분의 고민을 제가 논리정연하게 소개할 수는 없지만, 제가 이해한 바로는 이런 고민들을 해요. 지금 우리의 삶이 이상적이지 않은데, 이상적인 상태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블로그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역할을 하기 위해서 블로그는 어떠해야 하고, 블로거들은 어떤 노력들을 해야 할까? 그런 고민들을 한다고 이해하고 있어요. 민노씨는 블로그를 운영하는 것을 삶에서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이니, 민노씨의 중요한 정체성은 블로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이런 고민들은 블로거라는 정체성을 가진 분이 하셨으면 하고 제가 기대하는 고민입니다.

제 정체성은 자칭 개발자 영어 학습도우미(;;)입니다. 제가 하고 있는 일중에 그래도 제일 자랑스럽고 보람있다고 생각하는 일입니다. 제가 하고 있는 고민은, 현재 개발자의 삶이 이상적이지 않은데, 이상적인 상태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영어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역할을 하기 위해 나는 영어를 공부하도록 어떻게 도와드려야 할까? 이런 고민입니다. 매순간 고민하지는 못하지만 매일 고민하고 작은 실천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제가 어떤 정치인을 지지한다면, 지금의 삶이 좀 더 이상적인 상태로 되어 가는 과정에서 정치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정치가 어떤 역할을 해주어야 할까? 그런 고민을 하는 정치인을 지지할 것 같습니다.

각자의 분야에서 같은 종류의 고민을 한다는 이유로 저는 민노씨를 응원하고 지지하는데요, 민노씨가 지지하고 응원한다는 이유로, 민노씨가 지지하는 심상정씨나 노회찬후보, 곽노현후보는, 이런 성격의 고민을 하는 분들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런 고민을 하지 않는 정치인들이라면 민노씨가 지지하지 않았을 거라는 믿음입니다.

언젠가는 저도 정치에 대해서 좀 더 많이 알게 되어서 스스로 나는 이런이런 이유로 누구누구를 지지합니다. 라고 분명하게 쓸 수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다른 분들께 기대어서 진보신당의 정치인을 지지한다고 씁니다.

이 글 때문에 누구를 지지하시는지가 바뀌지는 않겠지만 이런 생각을 한 번 해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특히 누구를 지지할지 모르는 분들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떤 정치인이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가 불분명하거나 선거 홍보문구에 믿음이 안간다면, 어떤 정치인을 지지하는 주변 사람들이 바라보는 곳이 어떤 곳인지, 그 분들이 하는 고민이 어떤 고민들인지 한 번 생각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추.
트위터를 하게 된 이후로 마음에 빚이 생겼습니다. 트위터를 하지 않았다면 그 빚을 너무 늦게 느끼게 되었을 것 같아서 차라리 다행입니다.

댓글 9개:

  1. 저에 대한 평가는 다소 과한 듯 하지만 나솔님의 감정과 고민이 그대로 느껴지는 강동적인 글이네요.. 이런 글이 갖는 힘, 그 대화하고자 하는 힘이 블로그가 갖고 있는 힘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힘들이 즐거움으로 퍼져가면 참 좋겠네요. 저 역시 나솔님을 응원하고, '지지'합니다! 그런데 제가 제대로 힘이 되어드리지 못하네요... (늘 지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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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trackback from: 민노씨의 생각
    “시간이 갈수록, 어떤 트위터러가 올리는 트윗에는 좀 더 신뢰가 가고, 어떤 트위터러가 올리는 트윗에서는 대충 넘기게 됩니다.” http://bit.ly/cp3Rn7 ( nassol99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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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트위터타고 와서 글을 적어본다. 뭔가 느낀 점이 생겨서 말이지. 사람들은 왠지 자신의 정체성과 의미에 대해서 고민을 하면서 살고 있는 것 같다. 나이를 들면서 느끼는 것인데 나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내 정체성을 찾기보다는 스스로의 내면에서 만족할 수 있는 삶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더라. 그리고 그러한 점이 나를 매우 개인주의적인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 것 같고 말이지. 정치적인 고민을 한다는 것 지식인으로서 멋지다고 생각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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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블로그 글들도 시간이 갈수록, 어떤 블로거의 글은 좀 더 신뢰가 가고, 어떤 블로거가 올리는 글은 대충 넘기게 되더군요. 나솔님의 진솔함은 항상 저를 돌아보게 하고 글을 한 번 더 읽게 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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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민노씨 - 2010/06/01 01:48
    에고, 평가를 하려고 한 건 아니고, 그냥 소개한다는 의미로..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 자신이 현재 할 수 있는 걸 하는게 곧 서로에게 힘이 되지 않나 합니다 ^^ (왜 저에게 죄송해하시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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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98-박효근 - 2010/06/01 09:55
    반가워요~ 오프에서 아는 분은 블로그에 별로 들르지 않아서 살짝 민망했다는.. (들러도 자취가 없어 모르는 걸 수도 있겠지만요)



    정체성과 의미에 대한 고민.. 한국에 있을 때는 별로 안했는데, 한국을 뜨니까, 이게 나이 때문인지, 타향살이 때문인지, 지대로 고민을 하게 되네요. 오빠 말대로, 사회적 관계 속에서 내 정체성을 찾기 보다 스스로의 내면에서 만족할 수 있는 삶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건 저에게 정말 익숙한 생각인데요, 그리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는데요, 그래서 한국을 뜨겠다는 결정이 대수롭지 않았을수도.. 그 생각을 갖고 살기에 외국에서 산다는 건 최적의 조건이며 환경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게 말씀드리자면 좀 길어요.. 여튼 결국은 사회적 관계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그렇다고 과거의 사회적 관계를 그리워한다기 보다는, 이상적인 사회적 관계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된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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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뗏목지기™ - 2010/06/01 10:45
    안녕하세요 뗏목지기님, 부족함을 진솔함으로 봐주시니 감사드릴 뿐입니다. 블로그 글에 대해서도 공감해요. 다만 리더의 새글이 많이 쌓이다보니 좋은 블로그의 글을 충분히 소화하면서 읽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가..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구글리더를 열어야 겠어요.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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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nassol - 2010/06/01 16:22
    뭔가 나솔님은 정말 온 마음과 열정을 다해 열심인 것 같은데...

    저는 게으름을 부린달까.. 핑계를 댄달까... 그런 것 같아서요.

    뭐 그런 마음 때문에 죄송하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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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민노씨 - 2010/06/01 01:48
    그런 느낌이었군요.. ㅎㅎ 뭔가 열심히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가 있기는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은 듯;; 민노씨는 게으르다고 말씀하시지만, 민노씨 블로그에 가보면 과연 누가 그 말씀에 동의를 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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